어댑토젠(Adaptogen), 알고보면 대부분이 한약재

2025. 8. 25. 16:25삶을 바꾸는 식습관

 

철의 장막 너머에서 탄생한 비밀

1947년, 소련의 독물학자 니콜라이 라자레프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댑토젠(Adaptogen)'

 

신체가 스트레스에 적응하도록 돕는 물질을 뜻하는 이 용어는 냉전 시대 소련의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가 되었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병사들과 우주비행사, 올림픽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을 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암페타민 같은 각성제와 달리 부작용이 없으면서도 지구력을 높일 수 있는 물질을 찾던 중, 그들은 수백 종의 약초를 연구한 끝에 진정한 어댑토젠으로 인정할 만한 식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연구 기준은 까다로웠죠. 인체에 무해하고, 다양한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며, 신체 균형을 정상화시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연구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소련 정부는 1980년대까지 관련 연구 결과의 해외 발표를 금지했습니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어댑토젠에 관해 발표한 논문이 수천 편에 달했지만, 대부분 서방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았죠.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정거장에서 장기 임무를 수행할 때, 올림픽 선수들이 경기력을 향상시킬 때, 그리고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건강을 유지할 때 사용했던 그 물질 - 바로 어댑토젠이었습니다.

 

 

알고보면 대부분 우리가 사용하던 한약재

흥미로운 건 소련이 어댑토젠으로 분류한 많은 약재들이 이미 아시아에서 수천 년간 사용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인삼은 중국에서 5000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2000년 이상 사용되어 왔고, 오미자와 홍경천 같은 약재들도 전통 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죠.

 

특히 인삼은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의 '파낙스(Panax)'라는 학명을 가질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한때는 중국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었고, 한국의 백제시대에는 중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이었습니다.

 

소련 연구진들은 이런 전통 약재들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했고,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죠.

 

 

서구 의학의 조심스러운 접근

현재 미국 FDA는 어댑토젠을 의약품이 아닌 건강기능식품으로만 분류하고 있습니다.

 

일반 의약품처럼 엄격한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질병 치료 효과를 주장할 수는 없죠.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우울증 치료"라고는 못하는 애매한 위치입니다.

 

 

 

실제로 FDA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어댑토젠 제품에 대해 수많은 경고장을 발급했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치료 효과를 주장하거나 의학적 효능을 과장한 업체들이 제재를 받았죠.

 

서구 의학계는 여전히 "어댑토젠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연구는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같은 약재, 다른 접근법

동아시아에서도 단일 약재를 차나 건강식품으로 사용할 때는 서양의 어댑토젠과 비슷한 위치입니다.

 

하지만 의약품으로 사용할 때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죠.

 

 

 

한의학과 중의학에서는 수천 년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군신좌사(君臣佐使)'라는 정교한 배합 원리에 따라 처방을 구성합니다.

 

예를 들어 '육미지황환'은 신장 기능을 보강하는 처방인데, 숙지황이 주약(君藥)으로 핵심 역할을 하고, 산수유와 산약이 보조약(臣藥)으로 돕고, 목단피, 택사, 복령이 부작용을 방지하는 좌약(佐藥) 역할을 합니다.

 

이런 체계적 접근은 단순히 약재 하나를 복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치료법이죠.

 

 

과학이 밝혀낸 작용 원리

현대 과학은 어댑토젠의 작용 메커니즘을 점차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 axis)이라는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에 작용해 코르티솔 수치를 조절하고, 열충격단백질을 활성화해 세포를 보호하며, 염증 반응을 줄입니다.

 

실제로 아시와간다를 하루 240-600mg 복용한 임상시험에서 코르티솔 수치가 27.9% 감소했고, 불안과 스트레스 점수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소련 조종사들이 야간 비행 때 복용했던 오미자는 간 기능 보호 효과가 입증되었고, 우주비행사들이 사용했던 홍경천은 운동 후 회복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시장이 말해주는 현실

전 세계 어댑토젠 시장은 2025년 약 90억 달러에서 2035년 12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입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북미가 여전히 가장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죠.

 

FDA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물질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건 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전쟁터에서 사무실로

어댑토젠의 역사는 인류가 직면한 스트레스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한때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싸우던 병사들을 위해, 하늘 높이 날아 적기와 맞서던 조종사들을 위해, 우주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우주비행사들을 위해 연구되었던 이 약초들이, 이제는 매일 아침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끝없는 회의와 마감에 시달리며, 워라밸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초인적인 정신력과 체력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KPI와 실적 압박이 날아다니는 사무실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댑토젠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이유는, 스트레스를 없애주기 때문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적응(adapt)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생존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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